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읽는이야기


모든 집안 문제가 동등한 권위를 갖진 않는다. 상대방이 시리얼을 먹을 때 얼마나 소리를 내는지나, 발행일이 지난 잡지를 얼마나 오래 보관하고 싶어 하는지에 신경을 곤두세운다면 즉시 바보처럼 보일지 모른다. 식기 세척기에 그릇을 어떻게 포개 넣어야 하는지나, 버터를 사용한 뒤 몇 분 안에 냉장고에 넣어야 하는지에 대해 엄격한 규칙을 고수하는 사람을 무안을 당하기 십상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갈등이 대단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고민에 하찮고 별나다는 꼬리표를 붙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휘둘리게 된다. 결국 좌절하는 동시에 우리의 좌절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지 마저도 의심하게 되어 우리를 미덥지 않아 하거나 인내심이 부족한 청중에게 문제를 차분하게 설명할 자신감을 잃고 만다.

 

사실 라비와 커스틴의 결혼 생활에서 아무것도 아닌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말다툼은 거의 없다. 작은 쟁점들은 사실 단지 필요한 관심을 받지 못한 큰 쟁점들이다. 일상에서의 논쟁은 그들 성격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어져 나온 실밥이다.

 

토라짐의 핵심에는 강렬한 분노와 분노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려는 똑같이 강렬한 욕구가 혼재해 있다. 토라진 사람은 상대방의 이해를 강하게 원하면서도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설명을 해야 할 필요 자체가 모욕의 핵심이다. 만일 파트너가 설명을 요구하면, 그는 설명을 들을 자격이 없다. 덧붙이자면, 토라짐의 대상자는 일종의 특권을 가진다. 다시 말해, 토라진 사람은 우리가 그들이 입 밖에 내지 않은 상처를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를 존중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토라짐은 사랑의 기묘한 선물 중 하나다.

 

토라진 사람은 키 180센티미터에 어엿한 직업을 갖고 있을지라도, 진짜 메시지는 지극히 퇴행적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아직 젖을 먹는 아기이니, 지금 당장 나의 부모가 되어줘야 해. 당신은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하는지를 정확히 헤아려주어야 해. 내가 아기였을 때, 사랑에 대한 관념들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래주었듯이 말이야.”

토라진 연인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그들의 불만을 아기의 떼쓰기로 봐주는 것이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기본 요건은 자신의 성격 중 더 문제가 되거나 더 특이한 면이 있더라도 그 때문에 당황하지 않는 능력이다. 그들이 명료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대체로 원만한 사람이라는 대단히 가치 있는 인식을 길러낸 덕분이다. 그들은 적정한 수준의 인내심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신을 표현할 수단만 갖추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호의를 받을 만하고 또한 받을 수 있다고 능히 믿을 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이런 사람은 어릴 적, 모든 면에서 적절하고 완벽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도 아이를 사랑할 줄 아는 보호자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축복을 누렸음이 분명하다. 그런 부모는 자식이 적어도 한동안은 가끔 이상하거나, 난폭하거나, 화를 잘 내거나, 심술궂거나, 기이하거나, 슬퍼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수용할 줄 알고 그래도 가족의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 자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줄 안다. 그렇게 하여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솔직히 고백하고 대화할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을 심어준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잘 말하는 사람 못지않게 드물거나 중요하다. 잘 들어주는 사람 역시 특별한 자신감이 그의 비결이다. 이는 어떤 확고한 가정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는 정보로 인해 경로를 이탈하거나 그 무게에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있는 수용력을 말한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마음속에 얼마간 담아둘 혼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미 경험을 통해 모든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평범해 보이는 상황이나 말에 상대방이 약간 부당한 듯한 반응을 보인다. 온갖 짜증과 불안, 성마름, 냉랭함, 공황, 비난 등이다. 당하는 사람은 당황한다. 따지고 보면 애정 어린 작별 인사를 요구하거나 싱크대에 설거짓거리 한두 개를 남겨두거나 상대방을 이용해 가벼운 농담을 하거나 겨우 몇 분 지체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특이하고도 다소 과장된 반응이 나올까?

이는 눈앞의 사실들만 가지고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현재 시나리오의 일부는 다른 원천으로부터 동력을 얻은 듯하고, 특정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오래전에 형성된 행동 양식이 잠재의식 속에서 다시 떠올라 본인도 모르게 나타나는 듯하다. 심리학 용어로 말하자면, 과민 반응을 하는 사람은 과거의 감정을 현재의 누군가 전혀 당해 마땅하지 않은 사람 에게 전이시키는 것이다.

묘하게도 우리의 마음은 자신이 어느 시대에 속해 있는지를 인식하는 일에 늘 능통하지는 않다. 과거에 강도를 당한 사람이 침대 곁에 총을 두고 자다가 바스락 소리만 나도 깜짝 놀라 깨는 것처럼, 마음은 다소 쉽게 비약을 한다.

곁에 있는 연인에게 더욱 안 좋은 소식은 한창 전이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차분히 설명하는 고사하고 쉽게 깨닫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반응이 상황에 완전히 적절하다고 느낄 뿐이다. 반면에 그들의 파트너는 상당히 다르고 별로 기분 좋지 않은 결론, 상대가 유난히 이상하고 어쩌면 약간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전이의 위험성을 인정하면 짜증과 비난보다 공감과 이해에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두 사람은 갑자기 폭발하는 불안이나 적대감이 항상 그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그러니 그런 폭발에 매번 분노나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격분과 비난이 동정심에게 자리를 내준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우리는 정말로 책임이 있는 권력자에게 소리를 내지를 수가 없기에 우리가 비난을 해도 가장 너그럽게 보아주리라 확신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주변에 있는 가장 다정하고, 가장 동정 어리고,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 즉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면서도 우리가 마구 소리를 치는 동안에도 우리 곁에 머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에게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퍼붓는 비난들은 딱히 이치에 닿지 않는다. 세상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그런 부당한 말들을 발설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난폭한 비난은 친밀함과 신뢰의 독특한 증거이자 사랑 그 자체의 한 증상이고, 제 나름대로 헌신을 표현하는 비꾸러진 징표다. 분별 있고 예의 바른 말은 모르는 사람에게 할 수 있지만, 밑도 끝도 없이 무분별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믿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뿐이다.

 

학생을 가르칠 때에는 최고의 배려와 인내만이 효과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절대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되고, 특별한 기지를 발휘해야 하고, 수업을 할 때마다 깊이 스며들 수 있도록 시간을 충분이 주어야 하고, 한 번 신중하게 부정적 평가를 끼워 넣기 위해 최소한 열 번 칭찬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차분함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교사가 차분하려면 무엇보다 수업의 성패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해야 한다. 침착한 교사도 당연히 수업이 잘되길 바라지만, 고집 센 학생이 가령 낙제를 한다면 그건 기본적으로 그 학생의 문제다. 화를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은 각각의 학생들이 교사의 삶을 크게 좌우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교사의 성실성을 지배하지 못하고, 교사의 자족감을 결정하는 주요 인자도 아니다.

하지만 차분함은 사랑이라는 교실 밖을 맴돈다. 위험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학생은 단지 잠시 잠깐의 책임이 아니라, 평생을 건 약속이다. 실패하면 존재가 파탄이 난다. 그러니 우리가 자제심을 잃고 충고하는 행위의 정당성이나 고결함을 스스로 믿지 못함을 암시하는 서툴고 경솔한 말을 내뱉기 쉬운 것도 당연하다.

우리의 목표와 반대되는 결과에 이르는 것 역시 당연하다. 굴욕, 분노, 위협의 수준을 높여 개인의 발전을 앞당긴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꺾이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자아가 신랄한 모욕을 감당한 결과로 더 이성적이 되거나 자신의 성격을 더 깊이 통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 성격의 고질적인 측면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따뜻하게 접근한다기보다 우리의 천성을 야멸치고 분별없이 공격하는 것만 같은 제언에 맞닥뜨리면, 우리는 방어적이 되고 과민해질 수밖에 없다.

 

혹독한 수업은 학생들에게 그들의 교사가 단지 미쳤거나 성질이 나쁜 것이고 그래서 그 자신들은 논리상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는 안일한 생각에 기댈 여지를 준다. 터무니없이 극단적인 판정을 들으면, 우리는 파트너가 악랄하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이나마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위안을 얻는다. 감정에 치우쳐 우리는 배우자의 부정적인 평가와 조금이라도 비교할 만한 요구가 지워져 있지 않은 친구 및 가족들의 격려하는 어조를 대비시킨다.

 

부모가 아무리 겸손하게 부인하고 남들 앞에서 자신의 야망을 아무리 낮춰 말해도 아이가 생기면 적어도 처음에는 완벽함을 맹렬히 추구한다. 그저 또 하나의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완벽함의 특별한 표본을 창조하려 하는 것이다. 평범함은 통계상 정상임에도 결코 최초의 목표가 되지 못한다. 그 결과 아이를 어른으로 키우는 데 너무 막대한 희생을 치른다.

 

유명한 이론이 있다. 우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 끌리는 사람들은 우리가 어렸을 때 가장 사랑한 사람들과 뚜렷한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특유의 유머 감각이나 표현 방법일 수도 있고, 기질이나 정서적 성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찍이 우리의 든든한 보호자들과는 철저히 금지되었지만 성인이 되어 만난 연인과는 꼭 하고 싶은 행위가 있다. 우리는 한때 섹스를 꿈도 꾸지 말아야 했던 인물들을 여러 주요한 면에서 생각나게 하는 사람과 섹스를 하고 싶어 한다. 당연한 결과로 원활한 성교는 우리의 낭만적인 파트너와 그 아래에 놓인 부모의 전형을 과도하리만치 생생하게 연관 짓는 일을 차단하는데에 달려 있다. 잠깐 동안은 성적 느낌을 애정의 느낌과 쓸데없이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제는 아이들이 생기고 우리의 파트너에게 특별히 부모다운 면이 노골적으로 요구되는 순간 더욱 까다로워진다. 우리는 의식 차원에서는 우리의 파트너와 성적 금기의 대상인 부모가 물론 다른 사람이고, 그들은 지금까지와 똑같은 사람이며, 처음 몇 달 동안 아슬아슬하고 재미있는 행위를 함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상대의 성적 자아가 하루 종일 걸치고 있어야 하는 양육자로서의 정체성 밑에서 점점 희미해짐에 따라 그 구분은 갈수록 불분명해진다. 그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는 것이 (우리 자신조차 실수로 가끔 파트너에게 쓰는)바로 그 순결하고도 활기찬 명칭, ‘엄마’ ‘아빠.

 

삐걱대고 할퀴는 이런 충돌은 노골적인 분노보다 더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요즘 우리 수입의 3분의 2를 벌고 총액을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는데, 모든 것에 있어서 합당한 몫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아. 내가 단지 나를 위해 직장을 다니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실은 거의 만족스럽지 않고 항상 스트레스만 쌓이는데 말이야. 거기다가 이불 커버까지 맡기려고 하면 안 되지. 난 내 몫을 하고 있는데. 지난 주말엔 아이들을 수영장에 데려다줬고, 방금 전에는 식기세척기를 돌렸어. 사실은 누가 날 돌봐주고 보호해줬으면 좋겠다고, 정말 화가 치민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들은 다들 내가 집에 있는 이틀은 그저 쉬는 날이고 이런 시간이 있으니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내가 뒤에서 해놓는 그 모든 일 없이는 이 집은 단 5분도 유지되지 않는데. 모든 게 다 내 책임이야. 난 정말 쉬고 싶은데, 집안일을 넘기려고만 하면 언제나 내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 그러니 결국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편하지 싶어. 조명엔 또 문제가 있고 내일은 전기공을 따라다녀야 하겠지. 사실은 누가 날 돌봐주고 보호해줬으면 좋겠다고. 정말 화가 치민다.’

 

현대사회는 부부가 모든 면에서 평등하기를 기대한다지만, 실제로 기대하는 것은 고통의 평등이다. 그러나 괴로움의 복용량을 정확히 똑같게 계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불행은 주관적인 경험으로, 각 당사자가 실제로는 자신의 삶이 더 저주받았으며 파트너는 이를 인정하거나 속죄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언제라도 진지한 경쟁에 돌입할 수 있다. 자신이 더 힘들게 살고 있다는 자기 위안식의 결론을 피하려면 초인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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